meta name="naver-site-verification" content="b4cd9fc64a74c9edc2b2009dd01f326d86b538af" /> 왜 통일 신라는 입식 생활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왜 통일 신라는 입식 생활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북방민족의 유입, 생활문화는 왜 그대로였을까?  역사를 보다 보면, 정권이 바뀌거나 외부민족이 들어오면  생활양식까지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당나라 이후 유목민족의 영향으로  탁자, 의자, 침대 같은 입식 생활문화가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렇다면 신라 역시  북방민족이 일부 유입되었는데 , 왜 생활문화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을까요?

 

이 질문은 오랫동안 궁금했던 지점이자 한국의 전통방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1. 북방민족이 신라에 들어온 건 맞다

 

통일신라 이후 고구려유민, 말갈계 일부, 당나라계 귀화인, 또는 주변 유목민족의 후손 일부가 신라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사료와 고분 유물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 됩니다. 

 특히 경주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말갖춤, 찰갑, 장식유물등은  북방 유목문화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하죠.

 

2. 하지만 "생활문화"의 변화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유입 인구수 자체가 적었다. 

   중국처럼 북방계민족이 아예 대규모로 정권을 차지한 경우와 달리  신라에 유입된  북방계인구는 소규모, 그리고 대부분 정치, 군사적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층이었습니다. 인구수가 적고, 중심권력에 직접 영향을 주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활문화의  뿌리까지 바꾸기는 어려웠습니다. 

(2) 신라는 철저한  농경사회+온돌 중심의 좌식생활

     신라는 온돌이 발달한 사회였습니다. 바닥이 따뜻한 구조에서 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죠. 거기에  소반, 목책상, 진짓상 등  좌식에 최적화된 가구와 예절 문화도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중국 북방은 평야와 건조한 기후 덕분에 침대,탁자,의자등 입식문화가 유리했지만 한반도는 산이 많고 겨울이 길어서 온돌이 핵심이었고 이는 좌식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3) 더 깊은 이유: 문화수용에   대한 태도 차이

     중국은 실용중심의 혼합 문화에 익숙했습니다. 유목문화와 한족문화가 섞이면서 새로운 생활방식이 빠르게 정착되었습니다. 

  반면 에 신라는 골품제 사회, 즉 혈통과 위계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사회이었고 생활방식, 복식, 식사예절등은 쉽게 바꾸기 어려운 상징이었습니다. 즉 문화가 유입되더라도, 수용되는 영역은 장신구, 무기, 문양정도에 그쳤고  생활구조는 보존되어야 할 정체성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신라는 이미 온돌+좌식+농경기반의 안정된 구조를 갖추고 있었고  이 틀을 바꿔야 할   실용적 이유도, 문화적 개방성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문화란 늘 변화하지만, 그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 "단단한 층"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신라의 생활문화는 바로 그런 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외부문화는 유입되었지만,그걸 생활방식으로까지  흡수할 만큼 신라는 유연한 사회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때로는 단점이었수도 있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진 "온돌. 좌식, 소반, 찬기:같은 한국 고유의 생활문화가 오랫동안 지켜진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요?